 |
江澤民其人 |
[
www.ntdtv.com 2011-7-7 20:38]
특별 테마: 강택민 그사람(상) 專題片-江澤民其人(上集):江澤民為何能在六四後竄起?他的真實面目為何?
1989년 6월 24일 ‘6.4천안문사건’이 있은 지 20일 후 무명의 장쩌민이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총서기가 되었다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劉賓雁)]
당시 6.4학살의 음울한 그림자로 인해 전국적으로 비통하고 몹시 가라앉은 분위기였는데 뜻밖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해방군이 백성들에게 총을 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장쩌민을 몰랐습니다
십수 년이 지나면서 장쩌민은 중공 제3대 지도자가 되었고 이미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지만 그의 출신성분에는 오히려 온갖 의혹이 가득하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느라 조급해했다. 그렇다면 무려 15년이나 중국을 차지한 최고통치자이자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한몸에 지닌 이 인물의 진실한 면모는 대체 어떤 것일까?
1. 친일매국노 집안
만약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어떤 인물의 출신이 아주 불명예스러운 것 역시 역사의 필연적인 배치일 것이다. 장쩌민은 친일매국노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의 친부 장스쥔(江世俊)은 1940년 11월 왕징웨이(汪精衛)친일괴뢰정권이 수립된 후 난징으로 투신해 장관첸(江冠千)으로 개명했다. 그는 선전부 부부장(차관급)이자 사론(社論)위원회 주임위원인 유명한 매국노 후란청(胡蘭成) 휘하에 있었다.
[따지웬 칼럼니스트 장톈량(章天亮)]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사령관의 조수 중 딩모춘(丁默村)이 있었습니다. 특수공작을 담당한 그는 상하이시에 특무본부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겐지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특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딩모춘에게는 리스췬(李士群)이란 조수가 있었습니다. 리스췬은 당시 일본 통치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괴뢰정부의 인재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미래간부 양성반을 만들어 졸업생들을 괴뢰정부의 중간간부로 만들었습니다. 이 반은 모두 4차례 열렸는데 장쩌민은 제4기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장쩌민이 리스췬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4기 청년간부 양성반에는 모두 23명이 있었는데 사진에서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이 바로 장쩌민입니다.
1943년 제4기 청년간부 양성반을 졸업한 장쩌민은 직접 괴뢰정권 치하의 중앙(中央)대학에 입학했다.2005년 초 장쩌민이 자신의 자서전을 출판한 미국 기업가 로렌스 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대학을 장쑤(江蘇)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으로 선전했다. 사실 정말 유명한 중앙대학은 일찍이 국민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당시 난징에 있던 중앙대학은 왕징웨이 정권이 1942년 난징 금릉대학교 터에 설립한 가짜대학이다.
장쩌민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가짜중앙대학 전기과에서 몇 년을 다녔다. 그는 이곳에서 1945년 9월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경극과 월극을 배웠다.
얼마 후 충칭에 있던 중앙대학이 돌아오자 난징의 가짜중앙대학은 해산했다. 국민당정부는 9월 26일 “수복지역의 중학교 이상 학생들을 선별하는데 특히 일본 침략시 함락지역에서 전문과 이상의 학생들에 대해 심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난징중앙대학과 상하이교통대학 등 6개 대학이 매국노 학교로 나열되었고 그 재학생들은 가짜학생이니 모두 심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바로 이때 심사를 기다리던 장쩌민이 갑자기 실종되었다.
[따지웬 칼럼니스트 장톈량(章天亮)]
당시 심사대상은 대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심사받아야 했습니다. 가짜중앙대학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학력 역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심사의 목적은 심사를 통해 이들의 학력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쩌민은 이 일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이 친일매국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친은 일본군 선전부문에 근무할 때 장관첸이란 가명을 썼으며 일본군이 떠난 후에야 실명을 회복하고 고향에 돌아가 숨었습니다.
장쩌민 자신도 이 시기 역사를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매국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매국노들은 천궁보(陳功博) 저우포하이(周佛海)를 포함해 나중에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천궁보는 일본에서 소환되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장쩌민은 자신도 청산당할까 두려워했으며 장시(江西)성 융신현(永新縣) 몐화핑(棉花坪)이란 작은 마을로 도망가 반년을 은신했습니다. 그때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3월까지였습니다.
장쩌민의 도피기간에 중공 상하이 학생위원회는 심사에 불만을 가진 많은 학생들을 조직해 거리시위를 전개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얻었다. 국민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육부가 앞장서 1946년 3월 심사명령을 취소하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수업을 듣게 했다.”
장쩌민의 가족은 국민정부에서 가짜학생에 대한 심사를 취소하는 것을 보고 위험이 지나갔다고 판단해 장쩌민을 다시 불러왔다. 이때 난징 중앙대학은 이미 상하이교통대학과 합병되어 있었다. 때문에 장은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장쩌민은 이 시기 역사를 지워버리기 위해 인사파일을 만들 때
자신이 일찍이 중공에 가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중에 숙부 장상칭(江上青)이 총에 맞아 죽자 1943년부터 중공지하당이 영도하는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고 속였다.
2003년 3월 26일 중국2차대전연구회 회원이자 자유기고가인 뤼자핑(呂家平)은 ‘장쩌민의 역사와 입당시간 등의 문제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발표했다. 장쩌민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 이 보고형식의 문장은 내부적인 통로를 거쳐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기율위원회 정법위원회 중앙조직부 등에 전달되었고 인터넷에도 공개되었다. 이때부터 장쩌민의 감춰진 역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아부로 높은 지위에 올라
장쩌민에 관한 중공관방의 약력을 보면 1949년부터 1989년까지 40년간 장쩌민은 평범하게 보통 기술직원에서 상하이시 당서기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영도간부들이 대부분 비.판받거나 타도되었던 문화혁명 기간에도 그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정치운동이 극렬했던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인사파일 자료만으로 본다면 장쩌민은 열사의 자제로 출신성분이 갑자기 좋아졌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그는 젊을 때부터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냈습니다. 가령 처음 창춘 제1자동차공장에서 기술원으로 있을 때 그는‘커리쿵(客裏空)’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구소련의 연극 ‘전선’에 나오는 전문적으로 과대선전을 일삼는 거짓말쟁이 기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장쩌민의 이 별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아주 경솔한 인물로 보았으며 착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구소련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제1기계공업부에서 외사국장(外事局長)을 할 때 그를 싫어한 상사가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경솔하고 과장하며 본업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고위층 인사들에게 아부를 잘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컬러TV가 막 등장했을 때 당시에는 모두 국영공장에서 생산했습니다. 그는 일부 부장(장관급)들의 집에 대형TV를 한 대씩 보냈습니다. 그냥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 직접 배달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지도자가 TV를 잘 작동할 때까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극정성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阮銘)]
저는 그를 딱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1981년인데 당시 구무(穀牧) 부총리가 주재한 특구에 관한 업무회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장쩌민은 구무 수하에서 수출입업무를 주관하는 부주임으로 있었고 그가 주재하는 회의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기술관료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주임으로 구무 휘하의 부부장급 간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내에는 철저한 개방을 주장하는 후야오방과 개방을 주장하되 마카오와 같은 지역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덩샤오핑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후야오방은 특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며 구무에게 회의를 주재하게 했지만 구무는 천윈(陳運)의 의견에 따라 특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장쩌민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일부 공허한 말들을 했지만 특구를 진일보로 개방하는 것에 대해 지지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후야오방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저는 그가 관료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
그가 상하이 시장을 맡은 후 그의 부하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부부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상하이에 오면 반드시 자신이 직접 접대한다는 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어느 부의 부부장이나 부장이 상하이시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모두 접대하려고 했을까요? 이는 그가 연줄을 계속 이어가 윗사람들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과 리셴녠(李先念)이 상하이에 왔을 때 그가 어떠했을까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덩샤오핑은 매년 겨울에 갔고 리셴녠도 갔습니다. 상하이 교외에 아주 고급별장이 있는데 그들은 한번 오면 한두 달 가량 머물거나 심지어 두세달을 묵었습니다. 이때 장쩌민의 시중은 아주 주도면밀했습니다.
1989년 여름 중국은 개혁개방 10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물질과 정신생활이 점차 과거의 빈곤과 고립에서 벗어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방의 자유와 민주사상을 이해할 기회가 생겼다. 상하이에는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라는 민간 신문사가 있었는데 언론자유와 사상의 해방을 주장하며 늘 현 체제나 정책과 동의하지 않는 문장이나 평론을 발표해 독자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張國偉)]
당시 상하이에는 해방보(解放報) 문휘보(文彙報) 신민만보(新民晚報) 실업영어도보(實業英語導報) 시보(時報)가 있었고 TV와 라디오 방송국을 포함해 모두 6개의 매체가 있었고
도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도보는 인사와 경영을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민중들이 꾸린 매체였고 이런 풍격이 신문에 체현되어 기본적으로 관방 신문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구별은 언론의 풍격은 물론이고 소재선정이나 초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모두 달랐습니다.
1989년 초 세계경제도보는 개혁파 이론가 쑤사오즈(蘇紹智)의 장편발언을 게재해 중공보수파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 상하이에서 매체선전을 주관하던 당서기 장쩌민은 도보 편집장 친번리(欽本立)에게 지지를 표시했었습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신문이 나오자마자 중앙선전부에서 곧 문건을 발표해 신문을 압류했으며 다른 신문사에도 이 문장을 전재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발표했습니다. 보이보(薄一波)는 이 문장을 덩샤오핑에게 알렸는데 이 문장에서 후야오방 문제에 대한 불평을 했다는 이유로 당의 기율이 비정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당시 고위층 내부에서 이미 상의가 있었는데 실제로 반영된 소동은 보수파들을 몹시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이보가 덩샤오핑에게 알린 후 중앙선전부는 많은 압력을 가했고 우리 신문의 친번리 편집장도 힘든 날을 보냈습니다. 당시 상하이 춘절 하례회에서 장쩌민은 친번리를 보고 여전히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이 일에 대해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상하이 시위원회에서 압력을 낮춰줄 테니 마음을 놓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때문에 친번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제 생각에 나중 일과 아주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친번리가 장쩌민을 오판하게 했는데 관건적인 시각에 장쩌민은 그를 팔아먹고 반대했으며 안면을 바꿔 모르는 척 했습니다.
1989년 4월 개혁개방 초기에 많은 억울한 사건들을 명예회복 시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이 총서기에서 파면된 뒤 2년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베이징 상하이 등지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부가 언론자유를 개방하고 부패를 처벌하며 교육을 중시해 중국이 진정으로 민주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세계경제도보는 후야오방을 기념하는 좌담회를 개최했으며 좌담회 전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 중 장쩌민과 아주 가까운 류지(劉吉)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상하이 선전부 부부장 국가체제개혁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해외에서는 장쩌민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회의에 참가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상하이로 보고했습니다. 신문이 이미 인쇄된 상황에서 갑자기 상하이시 선전부장 천즈리(陳至立)의 전화가 걸려와 시위원회로 출두해 담화를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날 친번리는 인쇄소에서 신문 교정쇄를 확인하는 한편 시위원회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담화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원래 문장에서 다이칭(戴晴)과 옌자치(嚴家其)가 발언한 가장 격렬한 부분 몇백 글자를 삭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번리는 신문이 이미 인쇄에 들어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철회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이날 담화는 대략 7시부터 밤 12시를 넘겨 진행 되었습니다. 대화가 잘 되지 않자 그들은 장쩌민과 쩡칭훙(曾慶紅)까지 데려왔고 장쩌민은 친번리에게 심한 욕설을 했습니다. 소위 중공혁명에 참가한 경력에서 볼 때 친번리는 장쩌민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친번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이는 중공과의 관계, 장쩌민과의 관계, 왕다오한(汪道涵)과의 관계를 모두 결렬되게 했고 단번이 도보를 아주 특별한 위치에 서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도보가 언론자유를 추동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당시 그가 제출한 개념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10년을 진보하고 한걸음 물러나면 10년을 후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기회를 잘 이용해 앞으로 추진한다면 중국의 언론자유를 추동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중국의 언론자유가 돌파될 수 있다면 정치개혁은 장난에 불과하다 당시에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도보는 물러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부 공개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서방언론에 도보가 사찰 당하고 압력을 받는다는 소식을 보도하게 했습니다. 장쩌민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냈는데 아마 26일이었을 겁니다. 바로 4.26 사설을 발표할 무렵 상하이시에서 만인(萬人)간부대회를 개최했고 이 회의에서 친번리의 직무를 박탈했습니다. 이 결정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도보에 대한 장쩌민의 난폭한 처리는 상하이와 전국 지식인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다음날 상하이 거리에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공개적으로 ‘도보를 돌려달라’ 친번리의 직무를 회복하고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깃발과 현수막이 펼쳐졌다 상하이 작가협회의 일부 유명인사들도 앞을 다퉈 시위에 참가했으며 베이징 지식계와 언론계도 천명 이상의 인사들이 장쩌민에게 전화를 걸어 친번리와 도보에 대한 처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당시 자오쯔양은 북한에 가 있었는데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 정보처 업무를 주관하던 후치리(胡啟力)에게 상하이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후치리와 루이싱원(芮杏文)은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오쯔양이 북한에서 돌아와 회의를 열자 정치국회의에서조차 모두 장쩌민을 비판했으며 그가 일을 망치고 선동했으며 학생들을 진정시켜도 모자랄 판에 기자들까지 건드려 벌집을 쑤셔놓았다면서 그의 일처리가 적당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장쩌민은 몹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고 회의장에서 나올 때는 안색마저 변했습니다. 그는 일부 대책을 고민했고 몇 가지를 표현했는데 하나는 만약 중앙에서 책임을 물으면 선전부장인 천즈리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습니다. 둘째 당시 장쩌민 자신도 여러 차례 회의에서 내부적인 자아비판을 했으며 심지어 상하이 국장급 간부회의에서 자신이 움츠린 거북이처럼 벌벌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阮銘)]
장쩌민은 아주 긴장해 자기비판을 할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쩡칭훙이 좀 여유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중앙 내부에서 갈등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도리어 이 일을 이용해
단호한 반자유화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장쩌민 자신도 베이징으로 불려가면서 베이징에 가면 생사를 가늠할 순 없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총서기가 되었습니다.
3. 선혈을 짓밟고 중공 두목이 되다
1989년 6월 4일 새벽 천안문광장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반 국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64사건은 학생들을 동정하고 개혁을 지지하던 당시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을 물러나게 했다.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의 안배는 장쩌민을 권력의 정상으로 밀어올렸고 64탄압의 최대수혜자가 되게 했다.
[인터뷰 롼밍]
그래서 몇몇 원로들이 회의를 열었는데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덩샤오핑은 리루이환(李瑞環)이 톈진에서 괜찮게 했다고 여겨 처음에 그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천윈과 리센녠은 장쩌민 발탁을 지지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리센녠이 장쩌민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상하이에 간호사 출신의 첩이 하나 있었는데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때 장쩌민은 비밀을 준수하고 그의 첩과 아들을 알뜰하게 보살폈는데 이 때문에 리센녠의 총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무대에서 내려온 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가장 큰 조수들을 잃었다. 새로 무대에 등장한 장쩌민은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개혁개방을 비판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장쩌민이 총서기가 된 후 반면교훈을 얻었는데 바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두 총서기가 축출된 것은 모두 천윈 등 좌파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강경하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당시 많은 말들이 떠돌았는데 가령 사영기업과 개체호로 하여금 재산을 탕진하게 해야 한다는 등입니다.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하고 평화적인 체제변화에 반대하며 원래 지식인들이 쟁취했던 자유도 회수하고 시장경제에 관한 것도 일부 변화시켰는데 바로 후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진정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오직 개혁개방정책을 지속하는 것만이 공산당 통치를 유지할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 그는 장쩌민에게 이런 안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직접 행동을 취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안 되는 것을 보았지만 당시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주었고 군사위원회 주석마저도 넘겼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딸을 데리고 온 가족이 상하이, 선전, 주하이로 갔습니다. 그는 당시 개혁을 하지 않으려면 물러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정국이 아주 긴장되었고 사람들은 또 총서기를 바꾸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하지만 장쩌민을 끌어내리지 못한 이유는 이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덩샤오핑이 직접 선발하고 직접 끌어내렸습니다. 중국에는 ‘같은 일을 세 번 하진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덩샤오핑이 당시 개인적으로 한 말 중에 세 번째 사람은 제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능력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이 말을 듣고는 곧 정신을 차려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바로 이런 곡절이 있었습니다.
江泽民其人
[
www.ntdtv.com 2011-7-7 20:38]
1989年6月24日在“6.4天安门事件”过后20天,名不见经传的江泽民成了中国共产党新一任总书记。那个时候,没有多少人知道他。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当时,处在六.四屠杀的这么巨大个阴影下面,全国的情绪非常之悲痛、非常之低沉,意想不到的这么一个结果,谁也没有想到解放军会对老板姓开枪。所以在这种情况下面恐怕不会有很多人去认真地去对待这件事。再说他们也不了解江泽民。
十几年过去了,江泽民作为中共第三代领导人,已经成了中国人耳熟能详的人物。但是,仍旧没有多少人真正了解他。他身居高位,但身世却遭到重重质疑。他地位显赫,却一次次急于为自己立碑做传。这个占据中国最高统治地位达15年,及党政军三权为一身的人,其真实面目究竟是怎样的呢?
一.汉奸家事
如果冥冥之中有定数的话,历史的安排也必然会让某些人的出身极不光彩。江泽民生长在一个日伪时期的汉奸家庭,其生父江世俊在1940年11月汪精卫日伪政府成立后投奔南京,改名江冠千,担任宣传部副部长兼社论委员会主任委员,是著名的汉奸文人胡兰成的写作班子中的一员大将。
大纪元专栏作家章天亮 :“当时日本侵华, 土肥原贤二他是日本侵华是华中方面军的司令,他的副手就是丁默村。丁默村是搞特工工作的,当时在上海市有一条路叫集萃儿76号成立了一个特工总部。同时它通过中国特工训练计划得到了日本土肥原贤二的赏识,并在那里训练特务。丁默村有一个副手,这个副手就是李士群,李士群当时为了保障日本的统治能够延续长久,所以他需要为日本未来的伪政府的未来培养一些人才。所以当时办了一个未来干部培训班,对等于你进了我这班,等到毕业后能在伪政府中当干部。这个班一共办了4期,江泽民是第4期的学员,所以后来有人说曾经看到过江泽民和李士群的一张合影。当时第4期青年干部培训班一共是23个人,当时照相的时候,江泽民是前排左边第五个就是江泽民。”
1943年第4期青年干部培养训练班结业,江泽民直接送入伪中央大学,在2005年初,江泽民隆重推出他委托美国商人库恩写的《江泽民传》中,这个伪中央大学成为江苏最富盛名的高等学府。而事实上,那个真正最富盛名的中央大学,早已随国民政府迁到西南的抗日大后方去了。而南京这个所谓中央大学是汪伪汉奸政府在1942年南京金陵大学校址拼凑起来的。江泽民没有辜负其父的苦心栽培,在伪中央大学电机系读书的几年中,不仅弹拉唱跳又歌又舞,还学会了京剧和粤剧,直到1945年9月日本投降。不久,重庆中央大学复校,南京伪中央大学解散,国民党政府在9月26日颁布:“收复区,中等以上学校学生甄别办法,对日本侵华时的沦陷区公立专科以上的学生进行真审。南京中央大学和上海交大等6所院校,被列为汉奸伪学校,其在校学生为伪学生,均要进行真审。就在这时,正待真审的江泽民却突然失踪了。
大纪元专栏作家章天亮讲述 :“当时真审的不止是大学以上,包括高中、中学以上的都要进行 甄别审查。因为不承认伪中央大学,所以其大学学历也是不被承认的。而这个审查的目的就是通过真审对其学历进行重新考察。但是江泽民看到这个事情就非常害怕。因为其父就是一个汉奸卖国贼。其父当时在日本侵华宣传部门任职的时候没有用他的真名,他真名叫江世俊给自己换一个名字叫江冠千。等到日本人走后又恢复原名,并回到老家农村躲起来了。江泽民他自己也知道自己的这段不光彩的历史。因为当时大家对这个汉奸卖国贼是非常痛恨的。包括陈功博,周佛海后来都被公审。陈功博是从日本引渡回来后被公审的。江泽民看到这个问题之后他也害怕被清算,他就跑到江西,江西有个地方叫做永新县,在永新县有个非常小的村子叫棉花坪,江泽民就跑到这个地方躲了半年。当时从1945年的10月份一直躲1946年的3月份。”
在江泽民出逃期间,中共上海学委利用广大学生对真审的不满情绪组织学生走上街头游行抗议,引起社会舆论很大反响,国民政府见反甄审事件扩大,为了息事宁人,由教育部出面在1946年3月收回甄审命令,改为“一面接受,一面上课”。江泽民家人见国民政府取消了对伪学生的甄审,直到危险已过,就在当月把江泽民从江西接回。此时南京中央大学已与上海交大等校合并,前往上海交大校址。因此江就被转到上海交大继续就读。在中共夺取政权后,江泽民为了掩盖这段汉奸历史,在建立档案时,谎称自己过继给了早年加入中共,后来被乱枪打死的叔父江上青,而且从1943年起就参加了中共地下党领导的学生运动。
2003年3月26日,中国二战时研究会会员自由撰稿人吕家平写下题为《江泽民的历史和入党时间等问题应该调查》的万言书。以要求调查的报告形式通过内部渠道送达给了中共中央政治局常委会以及中央军委、中纪委、政法委、中组部等处,并在中国互联网上公开发表。从此,江泽民遮遮掩掩的历史变得广为人知。
二、钻营有术,平步青云
翻开江泽民的官方正式简历,人们可以看到从1949年到1989年的40年间,江泽民平稳的从一个普通技术人员上升到上海市委书记,甚至在领导干部普遍被批判打倒的10年文化大革命期间,他也没有受到任何冲击。这在那个政治运动一场激一场的年代是非常罕见的。仅仅靠在档案材料里有一个烈士子弟出身远远不够,那他是怎样做到的呢?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 :“他从年轻的时候起,就暴露了他某些致命的缺点。比方说他开始是在长春第一汽车制造厂当技术员,那个时候他就有个外号“客里空”,“客里空”是苏联的一个话剧,战争时期的一个话剧叫《前线》,这里面写到一个记者,这个记者就专门制造这个夸大的新闻,是个很不实在的人。那么我们至少可以从别人给江泽民的这个绰号里就可以知道江泽民是个很轻浮的人,不是一个踏踏实实、老老实实做事情的人。后来又去苏联留学就回来,我知道他在第一器械工业部做外事局的局长的时候,一汽部的领导就很不喜欢他,也是因为他轻浮、夸夸其谈、不务正业。后开他当了电子工业部的部长,我又听到一点情况,就是后来为什么他会当了中国第一号人物的一些情况,他很善于去巴结上层人物,例如:彩色电视机刚刚在中国出现,都是国营厂生产的,他就一台一台的把大彩电送到一些部长的家里。送也就完了而且他还要亲自送上门去,不但送到人家,还一直腿单跪在地上帮领导人把电视机调好,就是侍候的周周道道。”
原胡耀邦智囊团成员 阮铭:“我是只有见过他一面,1981年的时候。那时候开一个关于特区工作的会,是由谷牧副总理主持的。那时候江泽民是在谷牧手下当一个进出口办的一个副主任,他管这个会议,我在会议上碰到他,他讲的话让我觉得他是一个技术官僚性的一个人。他当时只是个副主任,副部级的干部,在谷牧领导下。但当时在党内已经有分歧,胡耀邦主张:彻底的开放,邓小平那时候呢,也是主张开放的,但是他还没有讲出厦门这样的地方应该怎么办。那么我这个报告胡耀邦一批,而且他重点肯定的批给谷牧要这个会议上讨论,但谷牧听到陈运的意见就是特区都是反对的。江泽民就是在这个中间讲一些空洞的话,但他不支持特区更大一步的开放,但他也不敢说反对胡耀邦的提议,所以我印象中他就是这样一个官僚。”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 到上海当市长之后,我就听到他下面的人跟我说,他有一个指令,就是说凡是北京来的副部长以上的干部他一定要出面接待。这没有多少必要,要看是哪个部的副部长,哪个部的部长,跟上海市政府工作有没有关系,对不对。你何必每个都接待呢?都接待要出席多少宴会啊,是不是?!(笑)那就说明他在继续拉关系,讨好上面的人物。那么,你可以想像邓小平和李先念到上海他又会如何的殷勤,对不对?!邓小平每年冬天要去,李先念也要去。在上海郊区有很高级的别墅,他们一住救住一两个月,甚至两三个月。那江泽民侍候的是非常之周到的。”
1989年的春天,中国进入了改革开放的第10个年头。人们的物质和精神生活在渐渐摆脱过去的贫困和与世界隔离的状态,不少人开始有机会认识和了解西方的自由和民主思想。在上海,一个名叫世界经济导报的民办报纸,因为倡导言论自由、解放思想,经常刊登一些对现行体制和政策有不同意见的文章和评论,受到读者的极大欢迎,
世界经济导报编辑张国伟先生 :“当时上海所谓时报两台,解放报、文汇报、新民晚报、实业英语导报、时报,然后电台,广播电台和电视台,算是6个具体单位,导报算是挤进去了,但是都是讲好的 ,就是一个看文件,他的一些人事任免和经济都是自负盈亏,自己决定。所以从这个角度来讲,导报一直坚持自己是民办,并把民办体现在报纸的风格上。基本上跟官方的报纸有很大的区别。这个区别无论是从言论的风格还是从选材,焦点的捕捉基本上都是不同的。”
1989年初,世界经济导报因为刊登一了一篇改革派理论家苏绍智的长篇发言而受到中共保守派的压力。当时在上海主管媒体宣传的市委书记江泽民曾当面对导报的主编钦本立表示了支持。
世界经济导报编辑张国伟先生:“据说这个报纸出来以后中宣部马上就发文件就把这一期的世界经济导报给扣了,然后也通知其他各个报纸不能转载这篇文章。而薄一波就拿了这文章就到邓小平那里告状,因为苏先生在这个文章里是为胡耀邦鸣不平,认为党的这个组织生活纪律不正常。那么这个问题是很出神经了,当时高层里面已经酝酿了一些,实际上返照的风潮,在这个时候保守派是很紧张的。薄一波到邓小平那里告状以后,中宣部就给了很多压力,钦本立作为我们总编来讲,日子也很不好过。就在这一年的春节团拜会上,就是上海的春节团拜会,江泽民看到钦本立的时候,就还拍拍他的肩膀,意思就是这个事情不要紧张,上海市委只会做减压器,不会做加压器,不会升温,只会降温。你放心好了,所以钦本立当时吃了一点定心丸,那么这个事我想跟后面的事情有很大关系。就是钦本立在看江泽民的问题上面导致了误判,没有料到江泽民在关键的时候会出卖他,会出尔反尔,翻脸不认人。”
1989年4月,因为在改革开放初期大量平反冤假错案而受到人们普遍尊重的改革派领袖胡耀邦在被罢免了中共总书记职务两年之后,突然去世。北京上海等地的大学生走上街头,要求政府开放言论自由、惩治腐败、注重教育,希望中国能够真正走上民主自由之路。世界经济导报为此召开了一个纪念胡耀邦的座谈会。并详细报道了座谈会全过程。
世界经济导报编辑张国伟先生:“那么参加这个会议里面有一个跟江泽民关系很近的人,叫刘吉。后来做上海宣传部副部长、做体改委的的主任,号称在海外是江泽民的智囊。他也参加了会议,会议后就在上海打报告。在报纸已经开印的情况下,钦本立突然接到了陈至立,上海市市委宣传部长的电话,要求他到市委去谈话,要求把这个报纸带去让他审一审。那天,钦本立一边在印刷厂看好报纸大样,让报纸开机印刷,一边就到市委办公室,上海那个康平路去谈话。谈话要求是,当时他们谈了一个尺寸,就是说这篇文章里面有几百个字要删,就是戴晴和严家其讲的最激烈的部分都要删除。其他的地方无所谓,但是钦本立说这个报纸都开始印了,怎么可以呢?他说不行,这个关系到整个大局,讲了很多理由钦本立还是坚持他的原则不能撤。从大概7点多钟一直谈到大概晚上12点多钟。那个时候实在谈不下去了,他们就搬救兵把江泽民和曾庆红一起搬出来了,那个时候江泽民出来把钦本立大骂一通,骂了个狗血喷头。因为从参加所谓中共革命的资历来讲,钦本立的资格要比江泽民还老,所以那次真的给钦本立挫伤很大,钦本立在这种情况下还是坚持,没有松口,就等于回去直接考虑吧,那么这个时候就等于跟中共的关系,跟江泽民的关系,跟汪道涵的关系都决裂了,一下子导报就站到了一个非常特别的一个位置上,那么在这个情况下面导报当时商量讨论怎么样推动这个新闻自由,当时提出了一个概念就是:进一步进十年,退一步退十年,如果我们抓住这个机会往前面推一下,那也许可以推动中国的新闻自由,中国新闻自由如果能够突破的话,政治改革就有戏。当时是这样想,所以导报非但没有退让,反而进一步的发表了一些公开声明,而且通过西方媒体也报道了被查封、被整的消息。那么江泽民一看这种架势,那就火来了,马上好像是在26号,就是在发表‘4.26 社论’的的前后,开了上海市万人干部大会,就在会上宣布撤钦本立的职务,这样就火烧起来了。”
江泽民对导报的粗暴处理,引发了一场席卷上海乃至全国知识界的抗议。第二天,上海街头发生了大规模游行,公开打出:还我导报和要求恢复钦本立职务以及言论自由的旗帜和横幅。上海作协部分名人纷纷参加游行,北京知识界和新闻界的上千名人士也致电江泽民要求收回对钦本立及导报的处理决定。
世界经济导报编辑张国伟先生:“当时因为赵紫阳在朝鲜,他打电话到北京,要当时主持数据处工作的胡启力,要他表态支持上海,胡启力和芮杏文基本上是采取一种比较中立的态度,没有太顺着他。赵紫阳从朝鲜回来以后开会,政局会议上面甚至大家对他有些批评,认为他把事情搞糟了、认为他去点火,本来扑火都来不及学生这面闹起来,又把记者这面捅个马蜂窝,大家感觉他处理不当,认为从方法上他处理不妥。那个时候江泽民有点慌了手脚,手足无措,据秘书讲:江泽民从会议厅出来的时候脸色都变了。那么他也商量了一些对策,表现几方面:一是如果中央怪罪下来,让陈至立来扛这个黑锅,因为陈至立是宣传部长。二是当时江泽民自己也在党政军很多会议上、内部变相的做了一些检讨,他甚至于在上海的局级干部会上都讲到自己是缩头乌龟,这个话很难听,不堪入耳。”
原胡耀邦智囊团成员阮铭:“江泽民一看就很紧张,想检讨,后来就是曾庆红就是说慢一慢,他听到消息说中央有内部决定斗争,可能是这样做要不行,所以江泽民就反而把这个事情变成他的一个坚决的反自由化的形象,所以江泽民自己讲,他自己被调到北京来,不知道到北京来是活还是死,结果下了决定,让他当总书记。”
三、脚踏鲜血 爬上中共头把交椅
1989年6月4日清晨,天安门广场发生了让全世界震惊的政府对普通百姓的血腥镇压。六四事件使同情学生,使支持改革的当时中共总书记赵紫阳丢掉了职务。看似偶然的历史安排,把江泽民推向了权力的顶峰,成为六四镇压的最大受益者。
原胡耀邦智囊团成员阮铭:“所以就是几个元老开会,8个元老开会意见分歧,邓小平开始想找李瑞环,邓小平觉得李瑞环在天津还搞得不错,陈云和李先念就提出支持江泽民。”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李先念为什么那么喜欢他,就是因为李先念在上海有个小老婆,现在叫二奶吧,就是李先念的一个护士跟他同居而且生了一个孩子,一个私生子,你想遇到这种事情江泽民第一个要替他保密,第二个对他的这个小老婆啊,小儿子啊,一定是伺候的周周道道,所以讨得了李先念的这个宠爱吧。”胡耀邦和赵紫阳下台后,邓小平失去了推动改革开放的最得力助手。新上台的江泽民,不仅不推动改革开放,而且从理论上批判改革开放。
原胡耀邦智囊团成员阮铭:“因为江泽民上台以后他接受教训,他就从反面接受教训,他认为胡耀邦、赵紫阳两个总书记垮台都是因为得罪了陈云,得罪了左派,得罪了激化进击派,得罪了谄谀派,所以他要显示强硬。”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那时候出了很多这一类的话,比如说一定要叫私营企业,叫做个体户,要把他们搞得倾家荡产,说了很多这种语言。反对资产阶级自由,反对和平演变,把原来知识分子争得的某些自由也收回,市场经济的某些东西也要改变,就是要倒退了。”
但是当时依旧是中国真正领导核心的邓小平却知道,只有继续实行改革开放的政策,才是使共产党维持统治的唯一途径。看到江泽民没能够有这样的眼光,邓小平于是亲自采取了行动。
原胡耀邦智囊团成员阮铭:“邓小平就看着不行了,邓小平那个时候就把所有的权利都交给江泽民, 军委主席也给了江泽民,那他没办法了,所以叫举家南寻,带着老婆和女儿跑到上海、跑到深圳、跑到珠海。他当时说,谁不改革,谁下台。所以当时局势很紧张,当时人家以为又要换人了。”
原人民日报特约记者刘宾雁说:“但是为什么没有把他搞掉呢,就是因为已经搞掉了一个胡耀邦,一个赵紫阳,都是邓小平亲手扶起来,亲手搞掉的。中国不是有一句话叫做‘事不可过三 ’嘛,据说邓小平当时私下也说过,就不能再搞掉第三个了,不然的话就把他搞掉了。并不喜欢他,一看能力也不行。江泽民听了邓小平这话之后赶忙就转弯子转回来,按着邓小平的旨意去做。就这么个过程。”
저작권자 ⓒ NTD Television & www.ntdtv.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