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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테마: 강택민 그 사람(상)(한,중,한글자막)






江澤民其人


[www.ntdtv.com 2011-7-7 20:38]

특별 테마: 강택민 그사람(상) 專題片-江澤民其人(上集):江澤民為何能在六四後竄起?他的真實面目為何?

1989년 6월 24일 ‘6.4천안문사건’이 있은 지 20일 후 무명의 장쩌민이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총서기가 되었다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劉賓雁)]
당시 6.4학살의 음울한 그림자로 인해 전국적으로 비통하고 몹시 가라앉은 분위기였는데 뜻밖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해방군이 백성들에게 총을 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장쩌민을 몰랐습니다

십수 년이 지나면서 장쩌민은 중공 제3대 지도자가 되었고 이미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지만 그의 출신성분에는 오히려 온갖 의혹이 가득하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느라 조급해했다. 그렇다면 무려 15년이나 중국을 차지한 최고통치자이자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한몸에 지닌 이 인물의 진실한 면모는 대체 어떤 것일까?

1. 친일매국노 집안

만약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어떤 인물의 출신이 아주 불명예스러운 것 역시 역사의 필연적인 배치일 것이다. 장쩌민은 친일매국노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의 친부 장스쥔(江世俊)은 1940년 11월 왕징웨이(汪精衛)친일괴뢰정권이 수립된 후 난징으로 투신해 장관첸(江冠千)으로 개명했다. 그는 선전부 부부장(차관급)이자 사론(社論)위원회 주임위원인 유명한 매국노 후란청(胡蘭成) 휘하에 있었다.

[따지웬 칼럼니스트 장톈량(章天亮)]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사령관의 조수 중 딩모춘(丁默村)이 있었습니다. 특수공작을 담당한 그는 상하이시에 특무본부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겐지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특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딩모춘에게는 리스췬(李士群)이란 조수가 있었습니다. 리스췬은 당시 일본 통치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괴뢰정부의 인재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미래간부 양성반을 만들어 졸업생들을 괴뢰정부의 중간간부로 만들었습니다. 이 반은 모두 4차례 열렸는데 장쩌민은 제4기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장쩌민이 리스췬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4기 청년간부 양성반에는 모두 23명이 있었는데 사진에서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이 바로 장쩌민입니다.

1943년 제4기 청년간부 양성반을 졸업한 장쩌민은 직접 괴뢰정권 치하의 중앙(中央)대학에 입학했다.2005년 초 장쩌민이 자신의 자서전을 출판한 미국 기업가 로렌스 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대학을 장쑤(江蘇)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으로 선전했다. 사실 정말 유명한 중앙대학은 일찍이 국민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당시 난징에 있던 중앙대학은 왕징웨이 정권이 1942년 난징 금릉대학교 터에 설립한 가짜대학이다.

장쩌민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가짜중앙대학 전기과에서 몇 년을 다녔다. 그는 이곳에서 1945년 9월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경극과 월극을 배웠다.
얼마 후 충칭에 있던 중앙대학이 돌아오자 난징의 가짜중앙대학은 해산했다. 국민당정부는 9월 26일 “수복지역의 중학교 이상 학생들을 선별하는데 특히 일본 침략시 함락지역에서 전문과 이상의 학생들에 대해 심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난징중앙대학과 상하이교통대학 등 6개 대학이 매국노 학교로 나열되었고 그 재학생들은 가짜학생이니 모두 심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바로 이때 심사를 기다리던 장쩌민이 갑자기 실종되었다.

[따지웬 칼럼니스트 장톈량(章天亮)]
당시 심사대상은 대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심사받아야 했습니다. 가짜중앙대학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학력 역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심사의 목적은 심사를 통해 이들의 학력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쩌민은 이 일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이 친일매국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친은 일본군 선전부문에 근무할 때 장관첸이란 가명을 썼으며 일본군이 떠난 후에야 실명을 회복하고 고향에 돌아가 숨었습니다.

장쩌민 자신도 이 시기 역사를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매국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매국노들은 천궁보(陳功博) 저우포하이(周佛海)를 포함해 나중에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천궁보는 일본에서 소환되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장쩌민은 자신도 청산당할까 두려워했으며 장시(江西)성 융신현(永新縣) 몐화핑(棉花坪)이란 작은 마을로 도망가 반년을 은신했습니다. 그때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3월까지였습니다.

장쩌민의 도피기간에 중공 상하이 학생위원회는 심사에 불만을 가진 많은 학생들을 조직해 거리시위를 전개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얻었다. 국민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육부가 앞장서 1946년 3월 심사명령을 취소하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수업을 듣게 했다.”

장쩌민의 가족은 국민정부에서 가짜학생에 대한 심사를 취소하는 것을 보고 위험이 지나갔다고 판단해 장쩌민을 다시 불러왔다. 이때 난징 중앙대학은 이미 상하이교통대학과 합병되어 있었다. 때문에 장은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장쩌민은 이 시기 역사를 지워버리기 위해 인사파일을 만들 때
자신이 일찍이 중공에 가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중에 숙부 장상칭(江上青)이 총에 맞아 죽자 1943년부터 중공지하당이 영도하는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고 속였다.

2003년 3월 26일 중국2차대전연구회 회원이자 자유기고가인 뤼자핑(呂家平)은 ‘장쩌민의 역사와 입당시간 등의 문제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발표했다. 장쩌민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 이 보고형식의 문장은 내부적인 통로를 거쳐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기율위원회 정법위원회 중앙조직부 등에 전달되었고 인터넷에도 공개되었다. 이때부터 장쩌민의 감춰진 역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아부로 높은 지위에 올라

장쩌민에 관한 중공관방의 약력을 보면 1949년부터 1989년까지 40년간 장쩌민은 평범하게 보통 기술직원에서 상하이시 당서기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영도간부들이 대부분 비.판받거나 타도되었던 문화혁명 기간에도 그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정치운동이 극렬했던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인사파일 자료만으로 본다면 장쩌민은 열사의 자제로 출신성분이 갑자기 좋아졌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그는 젊을 때부터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냈습니다. 가령 처음 창춘 제1자동차공장에서 기술원으로 있을 때 그는‘커리쿵(客裏空)’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구소련의 연극 ‘전선’에 나오는 전문적으로 과대선전을 일삼는 거짓말쟁이 기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장쩌민의 이 별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아주 경솔한 인물로 보았으며 착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구소련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제1기계공업부에서 외사국장(外事局長)을 할 때 그를 싫어한 상사가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경솔하고 과장하며 본업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고위층 인사들에게 아부를 잘해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컬러TV가 막 등장했을 때 당시에는 모두 국영공장에서 생산했습니다. 그는 일부 부장(장관급)들의 집에 대형TV를 한 대씩 보냈습니다. 그냥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 직접 배달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지도자가 TV를 잘 작동할 때까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극정성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阮銘)]
저는 그를 딱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1981년인데 당시 구무(穀牧) 부총리가 주재한 특구에 관한 업무회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장쩌민은 구무 수하에서 수출입업무를 주관하는 부주임으로 있었고 그가 주재하는 회의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기술관료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주임으로 구무 휘하의 부부장급 간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내에는 철저한 개방을 주장하는 후야오방과 개방을 주장하되 마카오와 같은 지역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덩샤오핑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후야오방은 특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며 구무에게 회의를 주재하게 했지만 구무는 천윈(陳運)의 의견에 따라 특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장쩌민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일부 공허한 말들을 했지만 특구를 진일보로 개방하는 것에 대해 지지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후야오방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저는 그가 관료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
그가 상하이 시장을 맡은 후 그의 부하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부부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상하이에 오면 반드시 자신이 직접 접대한다는 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어느 부의 부부장이나 부장이 상하이시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모두 접대하려고 했을까요? 이는 그가 연줄을 계속 이어가 윗사람들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과 리셴녠(李先念)이 상하이에 왔을 때 그가 어떠했을까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덩샤오핑은 매년 겨울에 갔고 리셴녠도 갔습니다. 상하이 교외에 아주 고급별장이 있는데 그들은 한번 오면 한두 달 가량 머물거나 심지어 두세달을 묵었습니다. 이때 장쩌민의 시중은 아주 주도면밀했습니다.

1989년 여름 중국은 개혁개방 10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물질과 정신생활이 점차 과거의 빈곤과 고립에서 벗어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방의 자유와 민주사상을 이해할 기회가 생겼다. 상하이에는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라는 민간 신문사가 있었는데 언론자유와 사상의 해방을 주장하며 늘 현 체제나 정책과 동의하지 않는 문장이나 평론을 발표해 독자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張國偉)]
당시 상하이에는 해방보(解放報) 문휘보(文彙報) 신민만보(新民晚報) 실업영어도보(實業英語導報) 시보(時報)가 있었고 TV와 라디오 방송국을 포함해 모두 6개의 매체가 있었고
도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도보는 인사와 경영을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민중들이 꾸린 매체였고 이런 풍격이 신문에 체현되어 기본적으로 관방 신문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구별은 언론의 풍격은 물론이고 소재선정이나 초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모두 달랐습니다.

1989년 초 세계경제도보는 개혁파 이론가 쑤사오즈(蘇紹智)의 장편발언을 게재해 중공보수파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 상하이에서 매체선전을 주관하던 당서기 장쩌민은 도보 편집장 친번리(欽本立)에게 지지를 표시했었습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신문이 나오자마자 중앙선전부에서 곧 문건을 발표해 신문을 압류했으며 다른 신문사에도 이 문장을 전재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발표했습니다. 보이보(薄一波)는 이 문장을 덩샤오핑에게 알렸는데 이 문장에서 후야오방 문제에 대한 불평을 했다는 이유로 당의 기율이 비정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당시 고위층 내부에서 이미 상의가 있었는데 실제로 반영된 소동은 보수파들을 몹시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이보가 덩샤오핑에게 알린 후 중앙선전부는 많은 압력을 가했고 우리 신문의 친번리 편집장도 힘든 날을 보냈습니다. 당시 상하이 춘절 하례회에서 장쩌민은 친번리를 보고 여전히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이 일에 대해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상하이 시위원회에서 압력을 낮춰줄 테니 마음을 놓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때문에 친번리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제 생각에 나중 일과 아주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친번리가 장쩌민을 오판하게 했는데 관건적인 시각에 장쩌민은 그를 팔아먹고 반대했으며 안면을 바꿔 모르는 척 했습니다.

1989년 4월 개혁개방 초기에 많은 억울한 사건들을 명예회복 시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이 총서기에서 파면된 뒤 2년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베이징 상하이 등지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부가 언론자유를 개방하고 부패를 처벌하며 교육을 중시해 중국이 진정으로 민주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세계경제도보는 후야오방을 기념하는 좌담회를 개최했으며 좌담회 전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 중 장쩌민과 아주 가까운 류지(劉吉)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상하이 선전부 부부장 국가체제개혁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해외에서는 장쩌민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회의에 참가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상하이로 보고했습니다. 신문이 이미 인쇄된 상황에서 갑자기 상하이시 선전부장 천즈리(陳至立)의 전화가 걸려와 시위원회로 출두해 담화를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날 친번리는 인쇄소에서 신문 교정쇄를 확인하는 한편 시위원회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담화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원래 문장에서 다이칭(戴晴)과 옌자치(嚴家其)가 발언한 가장 격렬한 부분 몇백 글자를 삭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번리는 신문이 이미 인쇄에 들어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철회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이날 담화는 대략 7시부터 밤 12시를 넘겨 진행 되었습니다. 대화가 잘 되지 않자 그들은 장쩌민과 쩡칭훙(曾慶紅)까지 데려왔고 장쩌민은 친번리에게 심한 욕설을 했습니다. 소위 중공혁명에 참가한 경력에서 볼 때 친번리는 장쩌민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친번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이는 중공과의 관계, 장쩌민과의 관계, 왕다오한(汪道涵)과의 관계를 모두 결렬되게 했고 단번이 도보를 아주 특별한 위치에 서게 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도보가 언론자유를 추동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당시 그가 제출한 개념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10년을 진보하고 한걸음 물러나면 10년을 후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기회를 잘 이용해 앞으로 추진한다면 중국의 언론자유를 추동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중국의 언론자유가 돌파될 수 있다면 정치개혁은 장난에 불과하다 당시에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도보는 물러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부 공개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서방언론에 도보가 사찰 당하고 압력을 받는다는 소식을 보도하게 했습니다. 장쩌민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냈는데 아마 26일이었을 겁니다. 바로 4.26 사설을 발표할 무렵 상하이시에서 만인(萬人)간부대회를 개최했고 이 회의에서 친번리의 직무를 박탈했습니다. 이 결정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도보에 대한 장쩌민의 난폭한 처리는 상하이와 전국 지식인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다음날 상하이 거리에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공개적으로 ‘도보를 돌려달라’ 친번리의 직무를 회복하고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깃발과 현수막이 펼쳐졌다 상하이 작가협회의 일부 유명인사들도 앞을 다퉈 시위에 참가했으며 베이징 지식계와 언론계도 천명 이상의 인사들이 장쩌민에게 전화를 걸어 친번리와 도보에 대한 처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경제도보 편집자 장궈웨이]
당시 자오쯔양은 북한에 가 있었는데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 정보처 업무를 주관하던 후치리(胡啟力)에게 상하이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후치리와 루이싱원(芮杏文)은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오쯔양이 북한에서 돌아와 회의를 열자 정치국회의에서조차 모두 장쩌민을 비판했으며 그가 일을 망치고 선동했으며 학생들을 진정시켜도 모자랄 판에 기자들까지 건드려 벌집을 쑤셔놓았다면서 그의 일처리가 적당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장쩌민은 몹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고 회의장에서 나올 때는 안색마저 변했습니다. 그는 일부 대책을 고민했고 몇 가지를 표현했는데 하나는 만약 중앙에서 책임을 물으면 선전부장인 천즈리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습니다. 둘째 당시 장쩌민 자신도 여러 차례 회의에서 내부적인 자아비판을 했으며 심지어 상하이 국장급 간부회의에서 자신이 움츠린 거북이처럼 벌벌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阮銘)]
장쩌민은 아주 긴장해 자기비판을 할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쩡칭훙이 좀 여유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중앙 내부에서 갈등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도리어 이 일을 이용해
단호한 반자유화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장쩌민 자신도 베이징으로 불려가면서 베이징에 가면 생사를 가늠할 순 없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총서기가 되었습니다.

3. 선혈을 짓밟고 중공 두목이 되다

1989년 6월 4일 새벽 천안문광장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반 국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64사건은 학생들을 동정하고 개혁을 지지하던 당시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을 물러나게 했다.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의 안배는 장쩌민을 권력의 정상으로 밀어올렸고 64탄압의 최대수혜자가 되게 했다.

[인터뷰 롼밍]
그래서 몇몇 원로들이 회의를 열었는데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덩샤오핑은 리루이환(李瑞環)이 톈진에서 괜찮게 했다고 여겨 처음에 그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천윈과 리센녠은 장쩌민 발탁을 지지했습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리센녠이 장쩌민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상하이에 간호사 출신의 첩이 하나 있었는데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때 장쩌민은 비밀을 준수하고 그의 첩과 아들을 알뜰하게 보살폈는데 이 때문에 리센녠의 총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무대에서 내려온 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가장 큰 조수들을 잃었다. 새로 무대에 등장한 장쩌민은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개혁개방을 비판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장쩌민이 총서기가 된 후 반면교훈을 얻었는데 바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두 총서기가 축출된 것은 모두 천윈 등 좌파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강경하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당시 많은 말들이 떠돌았는데 가령 사영기업과 개체호로 하여금 재산을 탕진하게 해야 한다는 등입니다.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하고 평화적인 체제변화에 반대하며 원래 지식인들이 쟁취했던 자유도 회수하고 시장경제에 관한 것도 일부 변화시켰는데 바로 후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진정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오직 개혁개방정책을 지속하는 것만이 공산당 통치를 유지할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 그는 장쩌민에게 이런 안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직접 행동을 취했다.

[전 후야오방 씽크탱크 멤버 롼밍]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안 되는 것을 보았지만 당시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주었고 군사위원회 주석마저도 넘겼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딸을 데리고 온 가족이 상하이, 선전, 주하이로 갔습니다. 그는 당시 개혁을 하지 않으려면 물러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정국이 아주 긴장되었고 사람들은 또 총서기를 바꾸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전 인민일보 특약기자 류빈옌]
하지만 장쩌민을 끌어내리지 못한 이유는 이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덩샤오핑이 직접 선발하고 직접 끌어내렸습니다. 중국에는 ‘같은 일을 세 번 하진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덩샤오핑이 당시 개인적으로 한 말 중에 세 번째 사람은 제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능력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이 말을 듣고는 곧 정신을 차려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바로 이런 곡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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